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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론의 개발과 사업화 듀퐁, 순수과학 지원에 나서다

ECONOMY 경영

2018-08-28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테크M=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찰스 스타인(Charles M. A. Stine, 1882-1954)은 1907년에 존스홉킨스대에서 화학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듀퐁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 사내 유기화학연구소장이 됐고, 1924년에 화학사업부 이사가 됐다.

당시 듀퐁은 역동적 외부성(Dynamic Externalism), 요즘 말로하면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을 기조로 하는 회사였다. 그들이 추구하던 제품 다양성은 주로 외부 기업을 인수해 해결했다.

하지만 스타인은 내부적 역동성(Internal Dynamism), 다시 말해서 조직 내 혁신을 통해 제품 다양성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제품 생산을 전제로 한 응용연구가 아니라 제품과 무관한 기초연구를 통해서 말이다(모스코이츠, 2016).

당시는 GE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 연구소가 응용연구와 사업화용 개발, 공정 개선 등에 치중하던 시절이다. 스타인은 듀퐁이 순수과학 연구를 통해 장기적으로 우수한 박사급 인력을 유치하고, 사업화 가치가 높은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대상으로 콜로이드(Colloid, 膠質), 촉매, 화학과 물리 데이터 생성, 유기합성물질, 중합체 연구의 5개 분야를 제안했다. 그리고 분야별 최고의 인재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중합체 구 책임자로 영입된 인물이 캐로더스(Wallace H. Cartothers, 1896-1937)다.

나일론 개발과 사업화의 3대 공신, 왼쪽부터 스타인, 캐로더스, 볼튼.

캐로더스는 1896년 아이오와 주 벌링턴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였던 애덤스 (Roger Adams)는 그를 가리켜 미국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유기화학자라고 칭송했다. 1926년에 캐로더스는 하버드대의 유기화학 강사로 위촉됐다.

1927년 어느 날, 정교수도 아닌 강사 신분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스타인은 듀퐁의 기초 연구 책임자 자리를 제안했다. 처음에 그는 망설였다. 학자로서 기업의 필요에 맞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 주제를 회사가 강요하지 않고 원하는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조
건을 듣고 그 제안을 수락했다. 더욱이 연구비도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회사에서 지원받을 수 있고 하버드대 급여의 2배에 달하는 6000달러(약 648만 원) 연봉까지 보장받았다.

스타인은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화 연구를 요구하는 회사와 자유로운 기초연구를 추구하던 캐로더스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덕분에 캐로더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유명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었고 회사도 관련 특허를 선점해 이 분야의 지식을 선도해 나갈 수 있었다.

신축된 연구소, 훗날 퓨리티 홀(Purity Hall)로 부르는 공간에서 1928년부터 캐로더스는 여러 신진 연구자들을 데리고 고분자 중합체의 구조와 합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볼튼과 캐로더스, 탁월한 경영자와 천재 연구자의 만남

그러나 후원자였던 스타인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스타인은 고위 경영진으로 승진하고 볼튼(Elmer K. Bolton, 1886-1996)이 그를 이어 화학 사업 본부장으로 들어왔다. 볼튼은 1913년에 하버드대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5년부터 듀퐁에서 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볼튼이 캐로더스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볼튼은 전임자에 비해 사업화 목표가 뚜렷했다. 기초 연구를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단지 사업화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을 때만 연구를 인정했다.그는 캐로더스에게 아세틸렌 기반의 중합체를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캐로더스는 아놀드콜린스(Arnold Collins)에게 샘플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다. 1930년 어느 날 콜린스는 우연히 클로로프렌 중합체를 만들어냈는데, 천연 고무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합성고무 듀프렌(Duprene, 훗날 Neoprene으로 이름 변경)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엔 파운드 당 몇 센트에 불과하던 천연고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날씨와 열, 기름 등에 대한 내성이 탁월해서 점점 사용처가 확대됐다.

합성고무 개발과 병행해서 캐로더스는 연구 조수인 줄리안 힐 (Julian Hill)과 함께 합성섬유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폴리에스터 섬유를 개발했다. 이것들은 과학적으로 우수한 특성을 보여줬지만 상품화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끓는 물에 들어가면 녹아버리기 일쑤였고, 유기용제에 닿기만 하면 해체되
곤 했다. 융용 온도가 더 높은 개선된 섬유를 개발하긴 했으나 실용화하기에는 한계가 많았다. 한계를 느낀 캐로더스는 연구를 포기했으나 볼튼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1930년대는 대공황기였다. 캐로더스 팀에 배정된 연구예산은 삭감됐고, 함께 일하던 직속 연구원 16명 중 절반이 그를 떠나기도 했다. 물론 캐로더스는 그동안 자신이 발표한 논문을 통해 화학계 내에서 위치가 매우 높아져 있었다. 다만 상업화할 수 있는 성과가 없었을 뿐이었다. 회사는 캐로더스의 천재성과 연구 역
량을 존중했지만 듀퐁도 기업인 이상 기약 없는 그의 연구를 무작정 지원해 줄 수는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캐로더스는 듀퐁을 떠나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까지 했다.

LA에 설치된 2톤-35피트(약 11m)짜리 나일론 스타킹 홍보 조형물. ⓒAmerican Chemical Society 1995

우여곡절 끝에 1934년에 폴리아미드(Polyamide) 섬유 프로젝트가 재개됐다. 볼턴의 지휘 하에 캐로더스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실험을 했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적용했다. 그 결과 1935년 2월, 아디프산(Adipic Acid)와 헥사메틸렌디아민산 (Hexameythylenediamine Acid)으로부터 어떤 물질을 합성해내는 데에 성공했다. 상온에서 이 물질을 늘어뜨리면 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강하고 탄력이 있으며 물이나 유기용제에도 끄떡없었고 융용 온도도 높았다. 꿈의 신소재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추가 연구개발이 필요했다. 원재료인 아디프산은 이미 독일에서 생산되고 있었지만 헥사메틸렌디아민산은 실험실에서나 만들어낼 수 있는 희소한 재료였다. 듀퐁의 엔지니어들은 이 두 재료를 모두 양산해낼 수 있는 공정을 개발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이 모든 개발에 대한 원천 지식을 축적해 놓았던 캐로더스가 1937년 4월 29일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음독 자살했다.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나일론 원사 판매 전략이 제품 다변화로 이어져

스타인과 캐로더스가 다진 반석에 거대한 집을 짓는 일은 이제 볼튼의 역할이었다. 1938년 10월에 듀퐁은 델라웨어주 시포드 (Seaford)에 공장을 건설했다. 230명의 화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갖추고 2700만 달러(약 291억 6000만 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서이 신물질 양산을 위한 개발을 진행했다. 듀퐁은 이 물질에 나일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볼튼 자신은 화학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능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그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조직 구성원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경영진을 상대로 나일론 프로젝트의 사업 타당성을 알리는 것은 물론, 다른 사업부서에 그 사업을 이해시키고 타 사업부서의 도움을 얻어내는 데에도 탁월했다. 순수 연구에만 매달렸던 캐로더스의 성과는 경영 마인드를 지닌 볼턴을 만나지 않았다면, 과학의 신기한 발견 하나 정도로 끝났을지 모른다.

그는 이 탁월한 신소재에 무한한 응용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사업화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쓸 데 없이 많은 용도를 처음부터 개발해서 리스크를 부담하는 것보다는 특수한 시장으로 수요를 국한했다. 나일론은 비단과 유사한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먼저 그는 여성용 스타킹 시장을 타겟으로 삼았다. 물론 소량이기는 했지만 칫솔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견본으로 제작된 스타킹이 이듬해 듀퐁의 윌밍턴 사무소의 직원들에게 우선 판매됐다. 이어서 윌밍턴에 거주하는 일반인들에게는 4000쌍을 내놓았는데 단 세 시간 만에 매진됐다. 나일론은 1939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World Fair)에서 소개됐다. 프리마케팅(Pre-marketing)을 통해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1940년 5월 15일 미국 전역에 나일론 스타킹이 본격적으로 출시됐다. 한 쌍에 1.15달러(약 1242원)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첫날 스타킹 80만 쌍이 팔려나갔고 나흘 동안 400만 쌍이 다 소진됐다.

1941년에는 전체 스타킹 시장의 30%를 나일론 제품이 차지했고, 듀퐁은 그해 나일론 원사 판매로 2500만 달러(약 270억 원)를 벌어들였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타킹 생산이 중단됐다. 대신 나일론을 소재로 하는 군용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낙하산과 타이어코드지가 대표적이다. 때마침 일본으로부터 비단 수입이 중단되는 행운도 따라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나일론 스타킹 생산이 재개됐다.

당시 신문들은 나일론의 반란(Nylon Riots)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모든 여성들이 앞다퉈 나일론 스타킹을 찾기 시작했다. 1946년 6월 피츠버그에서 스타킹 1만3000쌍 판매 행사에 무려 4만 명이 1마일(약 1.6km) 길이로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이 폭발적인 수요에 듀퐁은 예약을 받고 선금으로 판매하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나일론의 용도가 스타킹을 넘어 무한히 확대됐다. 글라이더 로프, 비행기 연료탱크, 방탄조끼, 구두끈, 모기장, 해먹, 낚시줄, 기타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상품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듀퐁이 1951년에 나일론이 외부 사업자들에게 나일론 생산을 라이센싱한 데 기인했다. 듀퐁의 이런 정책은 수요 폭증
에 대응하는 공급 증가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독점금지법을 피해 가려는 목적도 있었다.
 

나일론 사업화가 크게 성공한 이유

나일론 스타킹은 특정 시장에서 유례없이 첨단 제품의 초기 고성장이 가능했던 드문 사례였다. 조기 수용자의 탐색 단계도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공급 독점력을 들 수 있다. 듀퐁은 캐로더스의 관련 연구 성과에 대해 모두 특허를 등록해놓았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디에서도 나일론과 같은 특성을 지니는 합성섬유를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듀퐁은 1938년 9월에 특허를 등록하기 전까지 모든 개발 정보를 공식적으로는 비밀로 유지했다. 물론 1938년 초부터 신문사들이 냄새를 맡고 추측성 기사를 많이 내보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워싱턴 뉴스(Washington News)는 그해 9월에 나일론이 짐승의 썩은 살코기를 원료로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근거 없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 보도는 얼마 전에 있었던 캐로더스의 자살 사건과 연관돼 한동안 사람들에게 나일론에 대한 음습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듀퐁은 이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느라 한동안 애를 써야 했다.

그해 10월 12일에 시포드 공장 설립 허가가 나자, 스타인은 10월 27일자 헤럴드 트리뷴(Herald Tribune)을 통해 나일론 개발 성과를 최초로 공개했다. 1939년 12월 15일에 비로소 생산을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실험실 성과에 바탕을 두고 구축한 빈틈없는 양산체제다. 캐로더스의 실험실은 이미 소규모 공장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거기에서도 일주일에 100파운드의 나일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볼튼은 이 실험실의 공정을 시포드의 신축 공장에 성공적으로 확대해서 양산에 문제가 없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 끝에 스피닝, 상온 추출, 표면 코팅, 양산에 필요한 수많은 기술적 애로 사항을 충분히 해결했다.

다음은 당시의 수요다. 1930년대 여성들 사이에서 짧은 치마가 유행했다. 그래서 올라간 치마를 보완하는 실크 스타킹 자체가 패션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됐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1년에 평균 8쌍의 일본산 실크 스타킹을 구매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적절한 홍보와 마케팅 전략으로 이 수요에 불을 붙였다. 본격 출시되기 직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여성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로스앤젤레스(LA)에 설치한 거대한 나일론 스타킹 홍보 조형물은 당시 유명 여배우 마리 윌슨(Marie Wilson)의 다리를 본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본격 출시 전부터 퍼진 소문도 한 몫 했다. 캐로더스가 1931년에 폴리에스터 섬유를 처음 개발해서 이를 미국화학회(ACS)에 발표했을 때, 신문들은 듀퐁이 비단보다 더 뛰어나고 강한 섬유를 개발했다고 추측성 기사를 써댔다. 1938년 초에도 호기심 많은 기자들이 그런 기사들을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다. 정작 듀퐁사는 심하게
과장된 이 가짜 기사들을 사실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잠재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1950년대에 듀퐁은 패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의상 디자이너들에게 나일론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합성섬유 샘플을 대대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1955년 파리 패션쇼에서 코코 샤넬과 크리스티안 디오르의 합성 섬유 의상이 등장했다. 듀퐁은 저명한 패션 전문 사진작가 호르스트(Horst P. Horst, 1906-1999)를 고용했다. 피에
르 까르댕, 엠마누엘 웅가로, 니나 리치 등 수많은 디자이너들의 합성섬유 의상 작품을 촬영해서 전국 언론 매체에 뿌리기 시작했다.

나일론 시장은 1960년대까지 약 20년간 극성수기를 구가했다. 한때 참신했던 상품은 빛바랜 것이 돼버렸다. 무엇보다 1970년대 세계적으로 환경운동이 크게 일면서 사람들은 합성 대신에 천연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지금은 나일론에 비해 더 개선된 특성을 지닌 합성섬유가 다양하게 등장했고, 나일론을 입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초기 나일론 사업화야말로 이 모든 역사를 가능하게 한 원조로서 칭송 받아 마땅하다. 애플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21세기 모바일 문화 혁명을 일으켰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본 기사는 테크M 제64호(2018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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