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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인공지능 예술가 시대 사람 사는 세상이 먼저다

TECHM REPORT 테크 품은 예술

2018-08-24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테크M=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 로봇(I, Robot)’은 인공지능과 사람이 공존하는 2035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20세기 최고의 과학소설가로 꼽히는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이 원작이다.

이 영화에서 로봇혐오자인 주인공 윌 스미스가 로봇 써니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교향곡을 작곡할 수 있냐, 걸작을 그릴 수 있냐?” 그러자 로봇이 되묻는다. “너는 할 수 있어?”

2011년 IBM의 슈퍼컴퓨터 왓슨이 미국 제퍼디 프로그램에 출연해 퀴즈챔피언이 될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단지 기억력이 사람보다더 좋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IBM

4차산업혁명의 거센 물결 속에서 예술 분야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 예술가’다. 구체적으로 사람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예술적 창조력을 과연 인공지능이 발휘할 수 있을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인공지능과 창의성은 별개의 것처럼 보였다. 2011년 왓슨(Watson)이 미국 ABC의 ‘제퍼디(Jeopardy)’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퀴즈챔피언이 될 때까지만 해도 단지 사람보다 기억력이 더 좋은 기계가 등장했다고 여겼다.

특히 예술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의 창조력을 믿지 않는 분위기 였다. 일본 연극 ‘사요나라’에 등장하는 연기하는 로봇 ‘제미노사이드F’나 스페인의 유명 안무가 블랑카 리(Blanca Li) 작품에 로봇 무용수가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들은 단지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으로 움직이는 자동화기계에 불과한 존재였다.

왼쪽 사진을 보고 구글 딥드림이 그린 전자양(오른쪽). ⓒ위키미디어

그러나 학습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구글의 ‘딥드림 (Deap Dream)’이나 렘브란트풍의 그림을 그려내는 ‘넥스트 렘브란트(Next Rembrandt)’ 같은 인공지능을 활용한 수많은 예술작품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고정관념의 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날’이 일본의 호시신이치 문학상 1차 심사를 통과하고, 인공지능이 대본을 쓴 단편영화 ‘선스프링(Sun Spring)’과 뮤지컬 ‘비욘드 더 펜스(Beyond the Fence)’ 같은 소식을 듣자 사람만이 유일하게 예술적 창의성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기에 이른 것이다.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작품 등장으로 무너진 고정관념
게다가 예술분야에서 인공지능의 작품제작 능력은 사람을 뛰어넘는다. 구글의 마젠타(Magenta)와 바하 스타일의 음악을 만드는 쿨리타(Kulitta), 소니의 플로 머신즈, 스페인 말라가대의 아야무스(Iamus) 같은 작곡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은 하루에도 수백곡을 작곡할 수 있다고 한다. 왓슨은 영화 ‘모건’의 예고편 10편을 하루 만에 만들어내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대본을 쓴 단편영화 ‘선스프링’의 한 장면. ⓒ유튜브

실수도 거의 하지 않는다. 영국 예술학교인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s)의 샬롯 노드먼이 개발한 도자기 빚는 인공지능은 좀처럼 실수로 찰흙을 망치지 않는다. 일본의 록밴드 지머신스(Z-Machines)의 연주 스피드는 사람보다 앞선다. 4개의 팔과 8개의 스틱을 가진 마림바 연주 로봇 시몬(Shimon)은 두개 스틱으로 연주하는 사람보다 정확도에서 낫다는 평가다. 게다가 최근에는 작곡 능력까지 겸비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창의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입장이 갈린다. 창의성이 기존의 것을 모방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인공지능도 창의성을 가진 존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창의성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고안해내는 것이라고 했을 때는 달라진다. 인공지능은 어떠한 욕구나 욕망이 없다. 따라서 목적도 없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이것은 사람의 지시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떤이는 그들의 지능을 ‘낯설다’고 표현한다. 사람의 지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낯선 지능’. 맞는 얘기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창조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실 창조력에서 지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관이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지능보다는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이 위대한 창조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저 우주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이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는 창조의 원천은 직관에 있다. 인터넷 지식백과에 따르면 직관은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외계의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다.

또 철학에서는 감각과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작용을 일컫는다. 인공지능에게는 바로 이 감각이 없다. 단지 데이터를 읽는 장치만 있을 뿐이다. 그들은 경험하고 연상하며 판단하고 추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입력한 데이터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진정한 창조력을 갖고있지 않다. 한발 양보해서 설령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엉뚱한’ 창
조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인류의 인식을 바꾸고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는 예술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전문가도 구별하기 어려운 인공지능 시
이렇듯 인공지능에 의한 예술 또는 인공지능 예술가에 대한 논의는 주로 창조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은 진정한 창조력이 없고 따라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예술분야의 일자리가 줄어들 걱정은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점에서 구글 딥드림의 작품이 9만 7000달러(약 1억 864만 원)에 팔렸다는 사건쯤은 호사가들의 일시적 호기심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일반인이 대부분의 인공지능 작품과 사람 작품을 쉽게 구별해 내지 못한다는 현실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넥스트렘브란트 프로젝트가 만든 그림을 보여주고 둘을 구별하라고 하면 웬만한 사람이면 쉽게 구별한다. 2016년 열렸던 모차르트와 인공지능 작곡가의 대결 이벤트에서 실시되었던 작품에 대한 선호도 설문조사에서도 2배 가까운 사람들이 진짜 모차르트의 작품 손을 들어줬다. 정말 다행스럽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렘브란트 프로젝트는 워낙 유명한 사례이고, 모차르트 역시 인공지능 초기단계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후 사람들은 갈수록 사람과 인공지능의 예술을 구별해 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바울과 e다윗, 타이완국립대학팀의 ‘타이다’, 조지 워싱턴대의 ‘클라우드 페인터’ 같은 수많은 인공지능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그저 조금 수준이 낮은 예술가의 작품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공지능 작곡가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제는 일반인만 인공지능과 사람 예술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쓴 시와 사람이 지은 시를 보여주고 이를 구별하는 최근 실험 결과는 충격에 가깝다. 인공지능이 쓴 시가 더 좋다고 응답한 비율이 이미지가 있는 시는 49%, 이미지가 없는 시는 45%였다. 사실상 구분을 거의 못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는 조금 낫긴 하지만 40%, 43%로 일반인과 큰 차이를 나타내지 못했다. 이쯤 되면 가짜 예술가들이 판을 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선다. 인공지능이 만든 작품을 사람이 만든 것처럼 꾸미는 ‘사기예술’이 등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우려되는 점은 예술 소외가 심화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다. 그러지 않아도 ‘예술 회의론’이 심심치 않게 제기돼 왔다.

가령 헤겔은 철학자가 볼 때 예술의 역할이 이미 끝났다며 다음과 같이 갈파한 바 있다. “예술은 옛 시대에 여러 민족들이 그 속에서 추구하고 발견했던 것과 같은 만족을, 적어도 종교적인 측면에서 예술과 가장 내밀하게 관련되었던 만족을, 이제는 더 줄수 없다. 고대 그리스 예술의 아름다웠던 시절과 중세기 후반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 예술을 그 최고의 규정 측면에서 바라볼 때 우리에게 예술은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이고, 과거적인 것으로 머문다.” 요컨대 예술은 오래 전에는 종교에,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철학에 그 임무 수행 역할을 물려줬으며, 따라서 예술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진짜 예술에 친숙해져야 인공지능 예술 구별 가능
이렇게 거창한 수사가 아니더라도 예술은 현대에 와서 대중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예술의 종말’을 쓴 프랑스의 철학자 이브 미쇼(Yves Michaud, 1999)는 아방가르드 이후 현대예술의 위기를 진단한 바 있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인용했던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요약하면 이렇다.

“현대 예술은 권태스러우며(도메크, 클레르, 르 보트, 몰리노, 세나), 미학적 감동을 주지 않고(도메크, 클레르, 세나), 공허와 아무것도 아님을 감추는 지적인 사기의 효과다(보들리야르, 도메크). 심지어 현대 예술은 내용이 없으며(세나, 도메크, 보들리야르), 어떠한 것과도 닮지 않았고(도메크, 클레르, 세나), 어떠한 예술적 재능도 요구하지 않으며(몰리노, 르 보트, 세나), 미술관의 보호 아래서만 존재한다(도메크, 클레르). 결국 현대 예술은 그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과 단절돼 있다.”

그런데 더 현실적인 우려는 예술의 양적 팽창과 경계의 모호성에서 비롯한다. 보들리야르(J. Baudrillard)는 일찍이 너무 많은 예술로 인해 예술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모든 것이 다 예술이라고 한다면 딱히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는 얘기다. 미국의 미술비평가 겸 철학자인 아서 단토(2004) 역시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사실상 모든것이 예술이 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예술은 다시 한 번 기로에 서있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예술은 창작과 유통 면에서 많은 기회를 맞고 있다. 새로운 표현방법과 도구로 더 창의적인 예술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형식의 예술 또한 만들어질 수 있다. 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을 유통시킬 수 있는 수단도 갖췄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향유자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예술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수도 있다.

2017년 가을 이태리 피사에서 인공지능 지휘자 유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벤트를 열었다. ⓒ유튜브

2017년 가을, 이태리 피사에서 이색적인 음악회가 열렸다. 인공지능 지휘자 유미(YuMi)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벤트였다. 오케스트라의 협연지휘자로 나선 이 로봇의 데뷔 무대에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 같은 유명 연주자도 등장해 화젯거리를 보탰다. 그러나 신기함은 잠시, 이 흥행 이벤트를 바라보는 내내 여러 가지 생각으로 씁쓸했다. 무엇보다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로봇과 사람 지휘자의 음악을 구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향유자들로 하여금 진짜 예술을 더 친근하게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미가 깃든 작품에 익숙하도록 해야 한다. 그 예술작품을 왜 만들었는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적어도 인공지능과는 다른 느낌과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공지능과 사람이 만든 예술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직접 해보고 참여할 때 사람이 만든 예술에 대한 지지를 지속시킬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영화 ‘아이, 로봇’에 등장하는 로봇의 질문에 대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망연자실해서 아무말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로봇에게 당당하게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수 십초 내에 만들 수 있는 주크덱(Jukedeck)의 음악과 오랜 수련과 고민이 깃든 예술성 있는 사람의 음악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감수성이 있냐고. 또는 마르셀 뒤샹이 얘기한 엥프라멘스 (Inframince, 미세한 차이)를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냐고.

 

<본 기사는 테크M 제64호(2018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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