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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기술과 가전의 결합…전자레인지에서 읽는 융복합 지혜
[테크M=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인류가 불을 어떻게 처음 발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류를 짐승과 구분시킨 첫 도구 중 하나였던 불의 용도는 매우 다양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추위를 없애는 보일러로, 어둠을 밝히는 전구로, 적을 공격하는 화약으로, 그리고 음식을 조리하는 전자레인지로 진화했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되돌려주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는 이야기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전자레인지의 개발과 확산은 기술 혁신이 지니는 우연성,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융합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전자레인지는 방위사업체와 가전업체의 노하우가 결합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핵심은 마이크로웨이브(극초단파, Microwave)다. 마이크로웨이브는 이동통신이나 위성통신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수분과 만나면 열을 발생시킨다는 원리 때문에 전자레인지에 사용된다. 전자레인지는 정확하게는 마이크로웨이브 오븐(Microwave Oven)이지만 레이시언(Raytheon)사 최초의 브랜드였던 레이다레인지(Radarange)에 바탕을 두고 일본에서 전자레인지(電子レンジ)라고 불렸다. 이후 한국에서도 그 표현이 통용돼 왔고 이 글에서도 전자레인지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퍼시 스펜서의 우연한 발견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방위사업체 레이시언(Raytheon)은 진공관의 일종인 자전관(Cavity Magnetron) 생산에 여념이 없었다. 자전관은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에서 처음 개발된 레이더 장비의 핵심 부품이었다. 마이크로웨이브를 발생시키는 장치인 자전관은 원래 1910년 거르디엔(H. Gerdien)이 초기 형태를 선보였고, 1920년 GE연구소의 헐(Albert Wallace Hull)이 분리전극 자전관으로 개선했다. 이후 여러 가지 개선을 거쳐 반향식자전관(Cavity Magnetron)이 등장했다.
1945년 레이시언의 엔지니어였던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 1894~1970)는 자전관 옆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멀쩡했던 간식용 초콜릿이 녹은 것을 보았다. 그는 이것이 자전관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자전관의 출력을 높이자 옥수수가 팝콘이 됐고 달걀이 터져버리는 경험을 했다. 그는 연구 끝에 자전관에서 방출되는 마이크로웨이브가 전자기장을 형성하면서 음식을 가열시킨다고 결론지었다. 더욱이 금속 상자 안에서 마이크로웨이브가 나가지 못하도록 통제함으로써 그 안의 음식은 빠른 속도로 가열되도록 할 수 있었다.
스펜서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10대에는 방직공장과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제지공장에서 전기장치를 처음 접한 뒤 스스로 공부하면서 전기공학의 원리를 체득했다. 이후 공장의 전기 장치를 조작하는 일은 그의 담당이 됐다. 1912년(18세) 미국 해군에 입대한 뒤에는 무선통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이내 라디오 전문 기술자가 됐다. 정규교육 없이 순전히 독학만으로 해석학, 기하학, 화학, 물리학, 금속학 등을 섭렵했다. 하지만 귓병으로 2년 만에 의가사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보스톤에 있는 와이어리스스페셜티애퍼레터스(Wireless Specialty Apparatus)에 취직했다.
1925년 레이시언에 입사한 이후 그는 줄곧 라디오와 레이더장비 연구개발 업무를 담당했고 많은 성과를 냈다. 특히 자전관의 설계를 혁신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연합군의 레이더 장비 생산 효율 개선과 성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 해군에서 특별상(Distinguished Public Service Award)을 받기도 했다. 1964년 레이시언의 수석부사장으로 승진했고, 1970년 사망했다. 사후에는 고효율 자전관 개발로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에 헌액 됐다. 평생 획득한 300여개에 달하는 특허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전자레인지가 이토록 전 세계에 크게 확산될 것은 물론 전자레인지가 자신의 가장 대표적인 발명품으로 인정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레이시언은 미국 특허청에 이 기발한 조리기구에 대해 특허를 출원(US Patent 2,495,429)했고, 1947년에는 세계 최초의 전자레인지인 ‘레이더레인지(Radarange)’를 출시했다. 당시 레이더레인지는 높이가 1.8m, 무게가 340kg, 대당 가격이 5000달러(2017년 환산가격은 5만 5000달러)였다. 사람들은 뉴욕의 그랜드센트럴스테이션(Grand Central Station)에서 전자레인지로 신속하게 데워진 핫도그를 맛볼 수 있게 됐다.
이종 기업 협업을 통한 사업화
레이더 제작회사였던 레이시언은 주방기기 용품과 시장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그래서 한동안 타판스토브(Tappan Stove Company)에 라이선싱을 제공해서 가정용 모델을 생산 및 판매하도록 했다. 1955년 타판모델 ‘RL-1’이 출시됐다. 대당 가격이 1295달러(2017년 환산 1만 2000달러)로 하락했지만, 여전히 주방에 들여놓기에는 부담스러운 크기였고 고객 수용도가 높지 않아서 판매는 부진했다.
레이시언은 1965년 주방용품과 세탁기 회사인 아마나(Amana Corporation)를 인수해서 생산을 담당하게 했다. 2년 뒤 아마나는 크기도 훨씬 작고 가격도 대당 485달러(2017년 물가 환산 4000달러)로 획기적으로 낮춘 가정용 제품을 출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전자레인지는 대부분 주부들에게 신기한 제품으로 남아 있었다. 1970년 당시 전 세계 전자레인지 판매량은 4만대에 불과했다.
이후 전자레인지 시장의 고성장을 촉발한 회사는 방위사업체였던 리튼(Litton Industries)이었다. 리튼은 부실화된 자동차 회사였던 스튜드베이커(Studebaker)의 프랭클린 공장 마이크로웨이브 관련 설비들을 인수한 뒤 전자레인지 개발에 뛰어들었다. 리튼은 기존 레이시언의 거대한 오븐 개념을 탈피해서 전자레인지의 심상(心象, configuration)을 전혀 새롭게 구상했다. 세로로 높은 것이 아니라 가로로 넓은 모양이었다. 폭도 자그마하게 줄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전자레인지의 모습이다.
1972년 리튼은 2종의 전자레인지를 출시했는데, 각각 대당 가격이 349달러, 399달러였다. 당시 컬러TV 한 대 가격이 500달러였다.
리튼의 혁신 이후, 전자레인지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원조급인 아마나와 주방가전용품 전문 회사 월풀(Whirlpool)은 물론이고, 일본의 샤프 같은 전기회사들이 뛰어들기 시작했다. 1975년 판매량은 100만 대를 넘어섰다. 1970년대 후반 대당 300~500달러 내외에서 다양화 회사의 제품군이 형성됐다.
이후 일본과 한국 기업들이 전자레인지 생산비용을 크게 낮춰 시장에 진입하면서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전자레인지는 1980년대 선진국 가정에서 주방을 구성하는 필수 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1971년에는 전체 미국 가정의 1%만이 전자레인지를 사용했지만, 1986년에는 그 비율이 25%에 달했고, 1997년에는 99%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에는 아직도 전자레인지를 비롯해 냉장고와 같은 필수 가전기기 보급률이 1970년대 초 미국의 상황만도 못한 곳이 많다. 예를 들어 2013년 인도의 전자레인지 보급률은 5%, 2008년 베트남은 16%에 불과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1978년 삼성전자가 최초로 모델 RE-7700를 출시했다. 대당 가격이 39만4000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1인당 평균 월급 21만원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였는지 1979년 한국에 보급된 전자레인지는 400대에 불과했다. 대신 한국산 전자레인지는 내수보다는 수출에 주력했다. 1987년 삼성전자는 영국, LG전자(당시 금성사)는 터키에 공장을 지었다. 이후 전자레인지는 한국 경제의 대표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았고, 1995년 삼성, LG, 대우 등 한국 기업들의 전자레인지 생산량은 샤프, 파나소닉 등 일본 업체 생산량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전자레인지는 융복합을 통해 기능을 개선해가면서 성장 가능성을 남겨 놓고 있다.
지식경제와 기술 사업화의 속성
전자레인지야말로 1990년대 수확체증과 복잡계 경제학으로 한창 명성을 날렸던 브라이언 아더(William Brian Arthur, 1946~)가 그의 2009년 저서 ‘기술의 본질(The Nature of Technology)’에서 신기술이 진화하는 형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기술혁신은 성격상 조합(Combinatorial)을 통해 수행된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융합(Convergence)이다. 특정 기술에 관한 지식에 국한해서는 안 되며, 성격이 전혀 다른 여타 지식들을 결합해야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기술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모든 기술은 이미 있는 지식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해서 탄생시킨 것에 불과하다.
군사용으로 사용되던 자전자, 마그네트론 기술에 그런 속성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또한 설령 스펜서가 그런 우연한 발견을 했다 해도, 사사로이 치부하지 않고 이를 집중적으로 탐구해서 제품화로 성공시킬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기업 조직의 역할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아마 우리는 아직도 가스나 목재를 직접 태우면서 음식을 익혀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방위사업 마인드에 익숙했던 조직이 주방가전이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업종(異業種) 기업과 협력하지 않고 자기들 방식으로만 사업을 고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물론 지식은 성격상 물과 같아서 사방 천지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은 대개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지식의 촉각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먹이를 찾아내는 것이 지식기업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과거 지대한 비용과 노력이 들었던 인류의 여러 활동이 기술혁신을 통해 하나씩 저비용 구조로 탈바꿈해 왔다. 음식 조리에 수반되는 번거로움도 역시 전자레인지라는 혁신적인 제품을 통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즐겨 하는 직화(直火) 요리는 어쩌면 인간 유전자에 깊이 각인된 원시 수렵 시대의 추억 되살리기 행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 만 년 인류 문명 형성사에서 불이 차지했던 비중은 앞으로 더욱 줄어들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지식이 점점 늘어날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세다.
요리사들이 종종 전자레인지를 비하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살짝 변형된 러다이트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전자레인지로 조리한 음식이 유해하다는 시중의 근거 없는 괴담들도 반기술주의의 한 형태일지 모른다. 식품공학이 식량 생산에서 토지와 자연의 제약을 서서히 탈피하기 시작했지만, 먼 훗날에는 그 한 파생 지식으로 조리공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자레인지 발명이 아마도 그 원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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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혁신은 성격상 조합(Combinatorial)을 통해 수행된다. 특정 기술에 관한 지식에 국한해서는 안 되며, 성격이 전혀 다른 여타 지식들을 결합해야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모든 기술은 이미 있는 지식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해서 탄생시킨 것에 불과하다.
<본 기사는 테크M 제58호(2018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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