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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 M

가상과 실재가 공존하는 마술의 세계, 증강현실예술

2017-10-22글 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테크M=글 김선영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

#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구약성서에 나올 법한 금송아지를 마법처럼 등장시킨다.
# 아바타에 나름대로의 예술적 문신을 마음껏 새겨 넣는다.
# 실내 공간에 펼쳐져 있는 연못에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소담스런 물고기를 넣었다가 잡기를 반복해 본다.
#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서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모나리자가 윙크를 건네고 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로 변신한다.

컴퓨터게임이 아니다. 행위예술도 아니다. 그렇다면 마술? 맞다. 어떤 학자의 말대로 증강현실 예술이 인류가 선사시대부터 추구해 온 마술적 분위기의 실현이라면 말이다.

이런 장면들은 증강현실예술의 사례들이다. 비어있는 받침대에 금송아지를 등장시키는 작품은 제프리 쇼(Jefferey Shaw)의 유명한 ‘금송아지’(1994)다.

김준 작가의 ‘때밀이:푸른 물고기’(2010)에서는 아바타에 문신을 새겨 넣을 수 있다. ‘여인의 알몸에 있는 때를 벗겨내면 물속을 노니는 푸른 물고기가 있다’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세 번째 연못 스크린은 김태연 작가의 ‘하이퍼 피쉬’(2010)다. 이쯤 되면 네 번째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명화와 증강현실을 접목한 전시라는 것은 설명 없이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가상과 실재를 동시에 경험

증강현실예술은 가상세계와 실재 세계를 새로운 디바이스를 통해 물리적 현실 안에서 통합시키는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한 예술이다.

말하자면 현실 세계와 가상의 개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적 경험을 중심으로 관람자의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예술을 일컫는다(김희영, 2014).

이를 좀 거칠게 구분하자면 ‘금송아지’와 같은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혼합 및 변용, ‘때밀이:푸른 물고기’에서 보이는 아바타 조작을 통한 참여, 그리고 ‘하이퍼 피쉬’처럼 신체의 확장 또는 증폭을 표현하는 증강현실예술로 나눌 수 있다.

실제세계와 가상세계의 혼합 및 변용 사례로는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소개된 스페인 출신 미디어 아티스트, 파블로 발부에나(Pablo Valbuena)의 ‘증강된 조각(Augmented Sculpture series)’이 있다. 이 작품은 흰색의 실제 조형물 위에 프로젝션 영상을 투사해 가상과 현실을 중첩시킨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은 물론 공원, 시청 앞 광장 등에서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 조형물의 혼합현실을 경험한다. 하지만 실체인 흰색 조형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품이 성립할 수 없다.

 

현실과 가상현실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현실과 가상의 변주를 통한 공생적인 증강현실이다.

프랑스 출신 설치미술가 마리 세스터(Marie Sester)의 작품 ‘빔(Beam)’은 아바타를 통한 참여를 보여주는 증강현실 예술 사례다. 로봇 프로젝터로 전시장의 벽, 천정, 바닥 삼면에 할리우드 영화, TV프로그램, 비디오 전쟁게임 등 미국적 문화들을 투사하고 그 위에 아바타들을 중첩시킨다.

관람자들은 비디오 게임패드를 통해 찰리 채플린, 슈퍼마리오, 벅스 바니, 와일드 코요테 등 자신의 아바타를 조종하며 다양한 시간여행을 펼친다.

인간의 신체적, 생체적 능력을 증강시켜 주는 증강현실 예술 사례로는 미국 작가 스캇 스니브(Scott Snibbe)의 ‘불어넣기(Blow Up)’를 꼽을 수 있다.

관람자가 작은 미니어처 선풍기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으면 전시공간에 있는 12대의 대형 선풍기가 바람을 일으킨다.

전시장 내 관람자들의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하는 바람을 매개로 하여 작품에 참여하는 관람자와 다른 관람자 간의 자연스러운 공감과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단순한 인간의 호흡을 통해 바람을 물리적으로 증폭시키는 이 작품은 현실에 현실을 증강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소통


헤겔, 마르크스, 루카치, 아서 단토, 질베르 시몽동…. 이유들이야 다양하지만 이들은 하나 같이 예술이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결국 예술의 진보적 역할이 사라진다고 주장했다(조정환, 2015).

이 중에서 헤겔의 논지를 잠깐 살펴보자. 그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의 예술을 “참된 진리와 생동감을 상실함으로써 과거처럼 현실 속에서 그 필연성을 고수하고 최고의 지위를 지키지 못한다.

예술작품은 더 이상 우리들의 직접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그 작품이 우리들의 표상과 판단이 됐다”며 예술의 진화가 종료됐음을 선언했다.

헤겔이 살았던 시대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시각예술이 ‘우리들의 직접적 향유의 대상’이 못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는 소통이다.

 

갈수록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창의적인 생각은 좀처럼 소비자들과 소통되기 쉽지 않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스펙터클한 이미지의 지배가 더욱 확산되는 이 시대에는 그럴 개연성이 더욱 높다.

 

 

작가들은 좀 더 개성적인 창작을 위해 자신의 내면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현란하고 즉물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굳이 작가들의 복잡한 생각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시간적 여유뿐 아니라 넘쳐나는 볼거리들을 두고 미술관이나 화랑의 문턱을 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호모 나랜스(Homo Narrans). 1999년 영문학자 존 닐(John Niels)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특성을 지칭해서 붙인 말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이해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신화, 전설, 민담, 노래, 연극, 춤 등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전해왔다(김상욱, 2017). 회화나 조각도 마찬가지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부터 적어도 근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은 작품에 ‘이야기’를 담아내어 감상자들과 소통했다.

 

하지만 점차 작가와 관객이 공유할 수 있는 외연으로부터의 이야기 대신 작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연유하는 주관적 감정이 작품세계를 차지하게 됐다. 이제 작가를 알지 못하면 이야기가 사라진 개별 작품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현대는 유목주의(Nomadism) 시대라 불린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에 형성된 정보의 세상 속에서 낯선 것들을 만나며 새로운 자신을 찾아다닌다. 이런 유목주의에서 감성은 철저하게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소통된다.

유목민 관객들은 나 자신이 아닌 작가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일일이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탐구의지가 있더라도 갈수록 늘어나는 수많은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엔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이야기가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 대상이 없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더구나 디지털시대의 스토리텔링은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상적이고 우연적이면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호작용성에 의한 환상적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에 현대미술은 일반 사람들에겐 넘기 어려운 벽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통상 전시회는 어렵고 지루하다.

모처럼 전시장에 들어서도 스토리 없이 감각만으로 작품을 감상하며 오랜 시간을 머무는 것은 때로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그들에게 현대미술은 그들 방식의 이야기가 없을 뿐더러 스펙터클조차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입장에서도 자의반 타의반 자신들의 ‘예술장(field)’을 갈수록 더욱 공고히 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 일종의 자기보호 본능이다.

이렇게 해서 시각예술과 일반소비자 간 소통의 어려움은 확대 재생산되며 악순환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미술은 증강현실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와의 혼종을 통해 새로운 창작과 소통방식의 기회를 갖게 됐다.

증강현실은 작가와 관람객 간 소통의 기회를 확대해준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통해 도슨트 없이도 작가들의 생각을 전달하기도 하고 증강현실 자체가 작품이 되기도 한다.

본래의 작품을 왜곡하기도 하고 때론 보충하면서 관객이 납득할만한 또는 호기심을 자아낼만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캔버스는 멈춰있으되 회화는 움직이며 이야기를 담아낸다. 평면이나 입체 작품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이러한 실재성은 관객들로 하여금 환상적인 체험을 통해 더욱 흥미롭게 전시에 빠져들게 한다.

 


영화에서 아우라가 사라진 이유


한편 증강현실은 전통적 회화나 조각 등 미술작품에 잔존한 아우라를 벗겨낸다. 벤야민은 전통적 예술이 갖는 아우라는 기술 복제 시대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예술의 사용가치가 마술이나 종교제의에서 발휘됐던 흔적일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사진술의 등장에 의한 아우라의 소멸이다.

사진술은 예술에서 제의가치의 징표인 아우라를 사라지게 했고 따라서 예술은 제의가치에서 전시가치로 이동할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영화의 사례를 보자. 벤야민은 영화에서 아우라가 사라진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 중 하나가 관중과 연기자 사이에 형성된 간극이다.

 

영화에서 배우의 연기는 무대에서와 달리 카메라에 의해서 매개되고 감독에 의해 편집된다. 배우의 연기는 카메라와 감독의 시선을 거쳐야 비로소 연기로서 완성된다.

이에 따라 관객도 배우와의 개인적 친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비평가의 시각을 갖게 됨으로써 카메라처럼 배우의 연기를 시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연기자와 관중 사이에는 간극이 만들어진다. 이 간극에서는 종교제의적 가치와 아우라가 드러날 수 없다는 게 벤야민의 논리다.

 

증강현실 시각예술에서는 어떤가? 영화에 카메라가 있다면 증강현실 예술에서는 스마트폰이 작품과 관객 사이에 개입함으로써 아우라를 소멸시킨다.

카메라가 특정인에 의해 연출된다면 스마트폰은 소지한 사람 각각에 의해 조작된다는 측면에서 아우라 파괴의 정도는 영화에서보다 더 강하다. 아우라의 파괴는 곧 예술을 대중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

오늘날 증강현실은 항상 소지하는 스마트폰을 통해 일상화된다. 증강현실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 대중에게 증강현실 시대는 그리 가깝게 다가오지 않는다. 증강현실 기술이 빠르게 상업화되면서 다분히 단편적이고 편향적으로 활용되는 측면도 있지만 기술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하는 개성과 창의성의 부족도 그 원인 중 하나다.

 

‘예술과 기술’의 저자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의 지적처럼 기술 중심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길은 예술에 있다.

예술의 시대는 끝나고 모든 인간적 가치와 단절된 기술의 시대가 시작된다는 20세기 초 독일의 역사철학자 슈펭글러(Osward Spengler)의 예언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책임은 예술가와 예술감상자들에게 있다.

선사시대의 상상력과 역사시대의 기술적 이성이 하나로 종합되고(진중권), 환상과 실재가 중첩되는 파타피직스(pataphysics)의 세계(제프리 쇼), 증강현실예술을 더욱 많이 보고 싶은 이유다.

<본 기사는 테크M 제54호(2017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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