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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걱정이라고? “문제는 사람이다”

2016-04-30한상기 소셜컴퓨팅연구소 대표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가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가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테크포비아(techphobia)’ 또는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라는 말은 진보된 기술이나 복잡한 기기에 대한 공포나 비호감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이를 비이성적인 공포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정당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기계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은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675년에 직조공들이 자신의 직업을 뺏어간 방직기를 부수기 시작했고, 18세기에도 그 저항은 계속됐다.

이후 19세기 초인 1811년부터 1817년에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기계 파괴 활동이 네드 러드라는 인물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얘기에 따라 ‘러다이트(Luddite)’라는 이름이 생겼다.



러다이트는 착취하는 자본가 겨냥한 것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러다이트는 기계에 단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직하고 착취를 일삼는 자본가에 반대했으며, 기계가 보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숙련 노동자에 의해 사용되고 올바른 임금을 받게 해야 한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러다이트 운동은 지나친 빈부 격차에 반대하는, 단순한 기계 파괴 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강력한 처벌과 동시에 노동자 권익을 찾는 노동운동에의해 빈부 격차가 줄어들면서 가라앉았다.



전화가 발명되고 나서는 죽은 사람과 통화할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고,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컴퓨터가 널리 사용됨에 따라 또 다른 기술 공포증인 ‘컴퓨터공포증’이 나타났다. 이제는 스마트폰, 해킹, 프라이버시 침해, 로봇, 인공지능 등이 새로운 테크노포비아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한 두려움은 로봇 노동자들이 우리의 직업을 뺏어가 실업이 증가할 것이라는 것에서 시작해 인류 문명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관까지 그 범위가 넓다.



로봇이라는 이름이 1920년 카렐 차펙의 소설 ‘R.U.R’에서 등장했고, 그 의미가 노예라는 체코어 ‘로보타’에서 출발했듯이 처음부터 우리의 일자리와 관련이 있다. 이후 프란츠 랑의 1927년 영화 ‘메트로폴리스’, 리들리 스콧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가 복종하는 존재에서 궁극적으로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후 많은 SF 영화에서 기술적으로 크게 진보한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류 문명에 어떻게 위협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대중에게 기술 진보가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을 지속적으로 보여줬다.

이런 소설과 영화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모습은 대부분의 이익을 엘리트나 특권층이 향유하고, 별 볼일 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특권층이 억압하고 탄압하는 세상이다. 1%의 최상위층이 전 세계 부의 50%를 차지하는 수준의 부의 불평등을 겪고 있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상위 1%가 기술 발전의 결과를 독점하는 미래를 반길 수 없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직업을 잃게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욱 현실적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술 발전이 직업의 소멸과 함께 새로운 직업을 창출했다고 주장하지만, 데이터를 보면 그렇게 낙관할 수 없다.

옥스포드대학 마틴 스쿨 연구에 의하면, 1980년대에 새로운 기술에 의해 경력을 바꾼 미국 노동자는 8.2%였지만, 1990년대에는 4.4%였고, 2000년대에 와서는 0.5%로 급격히 떨어진다. ‘인간은 필요없다’라는 책을 쓴 제리 카플란도 직업 소멸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광범위해서 사회가 이를 대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 한다.


자율주행자동차와 같이 자동화, 지능화가 이뤄지면 인간은 점차 배제되는 상황이 된다. 사진은 구글이 테스트 중인 자율주행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와 같이 자동화, 지능화가 이뤄지면 인간은 점차 배제되는 상황이 된다. 사진은 구글이 테스트 중인 자율주행자동차)



자동화·지능화는 인간 배제로 이어져
또 다른 문제는 자동화, 지능화가 이뤄지면서 인간이 점차 배제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자율주행자동차로 인해 운전할 필요가 없어지는 사람, 드론이나 로봇에 의한 물류 관리와 배송, 알고리즘 기반 주식 투자, 자동으로 판단하는 공격형 무기 등 우리는 점점 기계가 더 효율적이고 안전하다는 생각에 의해 인간을 배제하기 시작한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반전’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주인이 세상에 직접 관계하지 않고 노예의 노동 결과를 향유하게 되면, 주인은 노예를 통해서만 대상에 관계하고 노예를 통해서만 욕구를 충족하거나 의존하게 된다.

주인이 주인일 수 있는 것은 노예를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발휘하고, 노동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의존성을 지양하고 자신이 독자적인 존재임을 인지한다.



물론 헤겔은 이를 주인-노예 관계의 해체, 지배의 원리에서 자유의 원리로 사회 이행이 필연적이며 이것이 시민사회 창출의 논리라 했지만,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로봇이 자신이 독자적인 존재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점점 노예인 로봇에 의존하는 삶을 살 것이다.

과연 주인 위치를 유지할 것인가? 만일 인공지능 로봇이 새로운 시민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온다면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회사가 법인이 됐듯이 로봇이 법률적 지위를 갖고 다른 자산을 소유하게 되며, 사회에서 권리와 책임을 갖게 되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그렇게 부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개선하고 학습의 속도가 증가하면서 우리가 이해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수준이 된다면 그 결과에 대해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전문가가 위협을 느끼는 부분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갖거나 사고를 할 수 있는 미래를 얘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인간의 특성인 감정 이입과 마음 읽기 특성은 로봇이 보이는 몇 가지의 움직임이나 표정으로도 로봇에게 인간성을 부여할 것이다.

이번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에서도 사람들은 알파고를 의인화하고 인간의 시각으로 감정을 부여하거나 생각을 읽어내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사람들이 알파고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는 쉽게 어떤 물체나 형상에 이런 감정 이입을 하는 성향이 있다.



로봇에 대한 친밀감이나 호감은 로봇이 인간을 닮지 않았을 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어느 순간 인간의 모습을 비슷하게 닮았지만 우리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을 줄 때 그 호감이 급속히 떨어진다. 일본의 로봇 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언급한 소위 ‘불편한 골짜기(Uncanny Valley)’이다.




귀여운 로봇에는 호감을 느끼지만, 누구를 닮거나 인간 모습을 한 로봇을 보면 우리는 겁을 내거나 기분이 나빠진다. 더구나 그런 존재가 나의 일을 뺏어가거나 나보다 판단력이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공포나 분노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미래 기술에 갖는 공포 역시 이런 이질적 불편함에서 기인할 수 있다. 미래에는 이런 불편한 골짜기를 넘어선 경우에도 경제적 여유를 기반으로 보통 사람을 넘어서는 강화된 인간을 보게 되면 또 다시 이런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의인화와 감정 이입은 호감을 갖는 로봇에 대해 새로운 권리를 얘기할 수 있다. 술 취한 사람이 ‘페퍼’를 발로 차거나, 성능 확인을 위해 ‘아틀라스’를 여러 방식으로 건드리거나 과제를 힘들게 할 때, 로봇을 학대하거나 괴롭힌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로봇 학대 금지법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없다.

사람보다 로봇을 더 친숙하게 여기고, 로봇과 사랑에 빠져 사람과의 관계를 거부하거나 나아가 내 유산을 상속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애완동물에게 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인간 사회에 인간이 아닌 감정을 교류하는(실제는 교류한다고 착각하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인간 사회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사람들은 이런 변화에도 두려워할 것이다. 영화 ‘AI’에서 로봇을 배척하고 파괴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의 특성인 감정 이입과 마음 읽기 특성은 로봇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알파고 역시 의인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간의 특성인 감정 이입과 마음 읽기 특성은 로봇에게 인간성을 부여한다. 사람들은 알파고 역시 의인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로봇과의 사랑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영국에서는 섹스 로봇을 금지해야 한다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다. 인간 사회에 이런 낯선 관계나 행동은 언제나 배척이나 거부를 유발했고, 사회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앞으로 30년 이내에 일부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남녀는 이런 문제로 고통 받을 수 있고 이는 또 다른 테크포비아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초지능’을 쓴 옥스포드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인공지능의 개발 못지않게 이의 통제와 윤리적 기준을 다루는 윤리위원회가 각 기업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개별 기업에 위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유엔이 인간 배아 복제 등에 대해 강력한 원칙을 세운 것과 같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엘론 머스크 등은 인공지능 개발 결과를 특정 기업만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전 인류가 공유하고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오픈AI’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우리가 새로운 기술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우리를 넘어서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 아니다.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결과에 무대책인 채로 이익만 쫓는 사람들에 의해 과속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은 정보 부족에서 출발
사람은 대상에 대한 정보가 적을수록 판타지를 상상하게 된다. 일반 대중이 갖는 두려움은 어쩌면 이런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적다는 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좀 더 올바른 정보와 지식의 보급 역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방안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기술을 개발하고 소유하는 사람들이 지키는 기본 원칙과 윤리 가이드라인이 나를 보호해주고 우리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영화 ‘엑스 마키나’를 연출한 알렉스 갈랜드는 SXSW 시사회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사람이다. 진짜로 나는 사람에 대해 걱정하고 우려하는 사람이다. 로봇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보다 더 이성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테크M 제37호(2016년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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