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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TV가 몰고 온 ‘색채 전쟁’, 승자에게 배우는 혁신의 지혜
ECONOMY 경영
[테크M=송경모 미라위즈 대표] 컬러TV 등장은 20세기 방송 기술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였다. 물론 이 전에 흑백TV와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도 처음 등장했을 때 충격적인 신세계였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계였다. 뒤이어 등장한 흑백TV는 그래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색맹이었다.
1950년대에 첫 선을 보인 컬러TV는 온전한 눈을 달아주었다. 사람들 앞에 별천지가 펼쳐졌다. 20세기 후반 컬러TV는 인류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여가와 오락 활동은 물론 정치와 광고, 시민운동, 문화예술, 교육 등 인류 삶의 거의 모든 분야가 TV를 통해 진화했고, 자신의 저변을 한껏 넓혔다.
두 거인의 대결
1940년대에 컬러TV 개발이 시작된 뒤 시장에서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거인 두 명이 일전을 벌였다. RCA 회장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 1891-1971)와 CBS 회장 윌리엄 페일리(William Samuel Paley, 1901-1990)가 그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은 전혀 달랐다. 동유럽 벨라루스 출신 이민자였던 사르노프는 엔지니어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청년 시절 마르코니의 회사에 사환으로 입사해서 통신 기술을 익혔다. 36세 되던 해에는 세계 최초의 라디오 네트워크 회사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를 설립했고, 훗날 그 모회사인 RCA의 회장이 됐다.
페일리는 필라델피아의 유복한 담배회사 가문의 아들이었다. 비즈니스와 방송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지만 통신 원리나 전기회로 같은 기술 분야에는 문외한이었다. 1927년 자금난에 빠진 라디오 회사를 인수한 뒤 회사 이름을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로 바꿨다.
두 사람은 라디오 업계에서 오랫동안 경쟁했다. 한 쪽이 프로그램을 내 놓으면 다른 쪽은 이를 모방해서 더 좋은 프로그램을 내놓고, 한 쪽이 스타를 한 명 영입하면 다른 한 쪽은 스타를 두 명 영입하는 식이었다. 이 경쟁 덕분에 라디오 프로그램은 더욱 풍성해지고 산업이 한층 발전했다. 둘은 모두 라디오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사르노프는 라디오라는 기기의 보급에, 페일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콘텐츠의 발전에 상대적으로 더 기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사르노프는 광고 수익보다는 공익적 가치에 더 중점을 뒀고, 페일리는 그 반대였다.
그러나 라디오 산업의 두 거인은 한결같이 미래 경영에 탁월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날 즈음 흑백TV 시스템은 모든 면에서 기술적으로 완성돼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40년대 후반 흑백TV 시장이 급성장했다. 1946년 미국의 흑백TV 수상기 판대 대수는 1만 대였고, 기지국은 11~12개 정도에 불과했다. 5년 뒤 이 판매 대수는 1200만 대 돌파와 기지국 107개로 급성장했다. 두사람 모두 흑백TV 다음은 컬러TV의 시대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연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미래를 직접 창조하는데 앞장섰다.
호환성에 집중한 RCA의 역전
물론 컬러 영상을 무선으로 전송하는 기술에 대한 선행 발명들은 20세기 초부터 있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수용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 흑백TV 기술이 안정화되는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컬러를 가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했다. RCA의 연구원들은 1940년대에 원시적인 형태의 2색 기반 영상 전송 기술을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에서 시연하기도 했다.
페일리는 기술자 출신은 아니었지만 탁월한 엔지니어들을 발굴하는데 뛰어났다. CBS는 헝가리 출신의 발명가 피터 골드마크(Peter Carl Goldmark, 1906-1977)를 중심으로 1940년대에 컬러TV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골드마크는 컬러TV 외에도 음악용 LP판(33-1/3 rpm)을 개발한 주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LP판 개발도 페일리가 이끄는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이뤄졌다.
RCA와 CBS 모두 이렇게 컬러TV 개발에 몰두하며 경쟁에 나섰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연구가 잠시 중단됐다.
CBS 연구소에서 컬러TV를 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르노프는 적잖이 놀랐다. CBS의 방식은 기계적으로 천공된 원판을 회전시키면서 색채를 연속으로 재현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사르노프는 CBS의 방식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별도로 제작된 컬러TV 수상기를 통해서만 재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많이 보급돼 있는 흑백TV 수상기에서는 재생이 불가능했다.
사르노프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후방 호환성(Backward Compatibility)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는 흑백TV를 폐기하고 새로운 컬러TV를 새로 구입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1946년 사르노프는 흑백TV에서도 재생이 가능한 컬러 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이 시스템은 기존의 기계식이 아니라 순전히 전자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RCA 연구실에서 엥스트롬(Elmer W. Engstrom), 헤럴드(Edward W. Herold), 켈(Richard Kell), 브라운(George Brown) 같은 연구원들과 동고동락하며 개발을 진행했다.
이렇게 개발한 기술을 둘 다 FCC에 표준 등록 신청을 했다. 하지만 1951년 FCC는 CBS의 손을 들어주었다. RCA는 표준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CBS는 도래할 컬러TV 시장에서 승리를 예약한 듯 환호했고, 거금을 들여 개발에 몰두했던 RCA는 절망했다. CBS는 곧바로 동부 해안 지역에 5개의 기지국을 건설하고, 컬러TV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념으로 똘똘 뭉친 사르노프가 멍하니 당하고만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기기 호환성이 결여되고 화질 역시 RCA의 것만 못한 것으로 보이는 CBS 방식을 승인해 준 FCC의 결정에 저항했다. 사르노프는 FCC의 결정에 불복하는 법정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당국으로부터 기술을 공인 받은 CBS는 일명 레인보우 작전(Operation Rainbow), 그러니까 백화점을 포함한 다양한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기기로 컬러 방송을 대중들에게 홍보했다. 하지만 막상 시장에서 CBS의 컬러 수상기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흑백TV에 익숙해진 눈에 CBS 수상기가 구현하는 색채는 아직 뭔가 어색했다. 더구나 CBS 방식의 컬러TV 가격은 흑백TV의 세배에 달할 정도로 비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CBS에 불리한 사건이 일어났다. 국방성이 CBS의 시스템에서 사용되는 인(Phosphor) 성분이 위험 물질이라고 공표한 것이다. CBS의 조립라인은 멈췄다. 이 틈을 타서 RCA는 자신의 기술을 더욱 개선할 시간을 벌었다. 이 개선은 쉐도우마스크CRT라 불리는 슈로더(Alfred Schroeder)의 1947년 특허에 바탕을 두고 이뤄졌다. 그 결과 RCA의 컬러는 더욱 개선됐고, 흑백TV에서 재생할 수 있는 전환기까지 개발됐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시연과 개선 끝에 1953년 RCA는 FCC로부터 표준 승인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s Committee) 표준이다. 이후 1990년대 디지털TV가 등장하기 전까지 NTSC는 프랑스의 SECAM(Sequentiel Couleur Memoire) 방식, 독일의 PAL(Phase Alternating Line) 방식과 함께 아날로그 TV의 주요 표준으로 활동했다.
시장 호환성과 영상 품질에 확신을 지니고 있었던 RCA는 수상기뿐만 아니라 촬영 카메라, 전송장치, 그리고 프로그램 구성의 모든 면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발해냈다. 1라운드의 승자 CBS는 2라운드에서 패자가 됐다. CBS는 물론 시장 전체가 결국 RCA 표준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1956년 4월 15일 오후 4시 15분, 사르노프는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5번 채널을 통해 첫 공식 컬러TV 방송을 개시했다.
초기의 시장 확산 저항과 극복
RCA의 1946년 10인치 흑백TV 히트작 630TS의 가격은 대당 435달러, 거의 자동차 한 대 값이었다. RCA가 CBS를 상대로 한 표준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1954년에 출시한 15인치 컬러TV 가격은 대당 1000달러였다. 21인치 대형 제품이 곧 나왔고, 가격은 이내 500달러 내외로 인하됐다. 흑백TV가 꽤 보급됐을 즈음에도 초기 컬러TV는 희귀품이자 사치품이었다. 당시 RCA 컬러TV인 CT-100을 보유한 집에서는 동네 사람이나 친구들을 초청해서 자랑하곤 했다.
당시로서 첨단 신기술 제품이었던 컬러TV 수상기의 광고 포인트는 ‘어린아이조차도 쉽게 채널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애플의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의 철학이 갓난아기조차도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추구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컬러TV 수상기는 여전히 조기수용자(Early Adopters)를 위한 제품이었다. 1960년대가 돼서야 더 많은 대중들이 컬러TV 구매에 나서면서 전기다수수용자(Early Majority) 고객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1년 월트디즈니가 ‘놀라운 컬러의 세계(Wonderful World of Color)’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대중들에게 컬러TV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고, 구매에 기폭제가 됐다. 1970년대 들어서야 미국인들의 컬러TV 구입 대수가 흑백TV 구입 대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흑백TV는 미국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컬러TV 보급은 미국에 비해 한참 늦었다. 영국이 최초로 1967년 BBC에서 컬러TV 공식 방송을 시작했다. 같은 해 서독, 네덜란드,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1969년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가 차례차례 컬러TV 방송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1977년부터 컬러TV를 만들어서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컬러TV 방송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KBS1)이었다.
컬러TV라는 신기술을 만나기까지 흑백TV시절부터 시작된 기반기술 탐색에 약 30년, 사업화 준비기간 10년, 그리고 미국에서 사업화 시작 이후 세계 시장에서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약 30년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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